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클라라 슈만 (문단 편집) === 연주 성향 === 기본적으로 클라라는 보수적인 음악성향을 가진 음악가였는데 남편 사후 이 보수성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클라라는 소녀 피아니스트 시절에 나름 리스트의 음악에 관심을 가졌지만 클라라 슈만이 된 이후 리스트를 멀리했으며 나중에는 그를 굉장히 싫어했다. 클라라는 악보에 충실하지 않고 자기식으로 연주하는 리스트의 연주 스타일을 경멸했으며 화려한 기교와 장식음으로 점철된 그의 작품성향도 싫어했다. 심지어 남편이 리스트와 친교를 맺는 것을 반기지 않았고 슈만이 리스트에게 자신의 C장조 환타지(op. 17)를 헌정하려는 것을 반대한 적도 있었다(결국 헌정하기는 했다). 1870년에는 리스트의 주도로 성대하게 거행된 빈 베토벤 페스티벌[* 베토벤 탄생 100주년 기념 행사]에 초청을 받았으나 참석하지 않았다. 또한 클라라는 [[바그너]]를 리스트보다 더 싫어했다. 바그너에 대한 태도는 단순히 싫어하는 수준을 넘어 거의 증오에 가까왔는데, 바그너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바그너)|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대해 '내가 이제까지 들었던 음악 중에 가장 역겨운 음악'이라는 저주를 했을 정도. 트리스탄과 이졸데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오페라에 대해 끔찍하다거나 타락했다는 표현을 쓰면서 비난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안톤 브루크너]]를 비롯한 친바그너 성향의 음악가들도 도매금으로 싫어했고 당시 많은 젊은 음악가들이 '바그너의 타락한 음악'을 추종하는 현상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이와 같은 클라라 슈만의 보수적인 음악성향은 클라라를 연모했던 브람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정확하게는 클라라 슈만이 아니라 슈만 부부라고 해야겠지만 로베르트 슈만은 브람스를 만난지 6개월만에 정신병원에 입원했으며 바그너를 둘러싼 논쟁이 격화되기 전에 사망했다. 슈만도 리스트나 바그너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아내만큼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브람스가 리스트나 바그너의 음악성향을 따르지 않고 고전파 시기의 음악에 심취했던 것도 클라라 슈만의 영향이 많이 작용했다. 정리하자면 클라라는 단순히 명 작곡가 슈만의 아내, 당대의 유명 연주자였을 뿐만 아니라, 남편 슈만의 사후에도 브람스를 비롯한 고전적 낭만주의 음악가들의 버팀목이자 대모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19세기 내내 지속된 바그너, 리스트 등 후기 낭만파 진영과의 경쟁에도 보이지 않는 주역이 되었다. 이 점에서 클래식 음악사에서 그의 영향력은 세간의 인식보다 대단했다고 평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